역사 약탈혼 Ⅲ : 오스만 제국에서의 약탈혼 2018/08/09 15:04 by tanrim





몽골 침입으로 인해 이슬람 법 체계는 중대한 발전을 경험했다. 이는 일종의 세속법전이라 할 수 있는 카눈나메ḳānūn-nāme의 등장이다. 칭기스 칸의 자삭ǰasaγ(튀르크어로는 야사yāsā. 문자 그대로 ‘법’을 의미)와 그것에 대한 신성시는 왕조의 법이 충분히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관념을 이슬람 세계에 확산시켰다. 군주의 독립적인 입법권ʿurf에 기초하여 재정된 성문법 카눈은 대개 샤리아가 다루지 않거나 시대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부분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법 조항들을 마련했다.(이은정, 2013: 203) 몽골 제국이 무너진 후 생겨난 많은 튀르크몽골 국가들에서도 자삭에서 영감을 얻은 실정법들이 야삭yasaḳ 또는 카눈ḳānūn이란 이름으로, 또 이를 모은 법전이 야삭나메yasaḳ-nāme 또는 카눈나메란 이름으로 형성되었다.(İnalcık, 1997: 562)


강간과 별도로 성교를 위한 소년, 소아 그리고 여성의 납치를 범죄로 규정한 것 역시 샤리아에 의거한 것이 아닌 카눈에 의거한 것이었다. 둘카드르조Dulqadırlı(아랍어: Dhūl-Qādiriyya)와 오스만조의 카눈나메에서 납치는 범죄로 규정되었다. 둘카드르조의 군주 알라 알다울라ʿAlāʾ al-Dawla(1515년 사망)가 제정한 카눈나메에서 납치혼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는 둘카드르조 영토에서 부족간 약탈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하튼, 둘카드르조에서는 납치자 개인에 대한 벌금 규정(진짜납치혼이냐 가짜납치혼이냐에 따라 20개에서 30개 사이의 금화)이 존재했고, 부족 약탈에 동참한 이들에 대한 처벌 조항도 존재했다. 처벌 사례들로 반추해볼때, 약탈대의 각 구성원들은 각각 8개에서 15개 사이의 금화를 벌금으로 지불해야 했으며, 이와 별개로 약탈 과정에서 부상입은 이들에 대한 보상금 또한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국가의 바예지드 2세Bāyezīd II(재위: 1481년 ~ 1512년)와 셀림 1세Selīm I(재위: 1512년 ~ 1520년)의 카눈나메에서는 소년, 소녀 그리고 여성을 납치한 남성에 거세의 형벌을 가하는 것을 규정했다.(Semerdjian,2009; Ergene, 2011)


1850년부터 1858년까지 제정된 근대 오스만 법전에서 납치혼은 범죄로 규정되었다. 1858년법에서 소년 납치에 대해서는 3개월에서 1년 사이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피납치자가 소녀인 경우 처벌은 더 가중되어, 3년에서 15년 사이의 노역형에 처해졌다. 만약 피납치자가 미성년 여성이며, 성적으로 학대받은 경우, 강간범은 극형에 처해졌다. 만약 피납치자가 성년 여성인 경우 3개월에서 3년 사이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만약 여성이 기혼자라면 3년에서 15년 사이의 노역형이 선고되었다. 납치에 가담한 사람의 경우 1개월에서 6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Ergene, 2011)


이전에 비해 강력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시대에도 여전히 약탈혼은 빈번했다. 특히 농촌이나 동부의 유목민 거주지대에서 그러했는데, 이는 오스만 국가가 유목민 거주지나 농촌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기 때문이다.(Ergene, 2009)



에두아르드 프레데릭 빌헬름 리히터, 하렘. 하렘의 여인들 상당수도 납치혼의 피해자이다.


역사 약탈혼 Ⅱ : 중앙유라시아와 이슬람 세계의 약탈혼 2018/08/05 23:17 by tanrim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의 약탈혼


그러나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 약탈혼은 다른 문화권에 비해 오랜 기간 존속했다. 이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 그리고 지리적 요인과 관계가 있다. 첫째로,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는 엄격한 족외혼의 원칙을 요구했다. 그런데 초원은 그 지역이 광활한데 반해 인구밀도가 낮았다. 따라서 남자는 취처를 위해 아주 멀리 떨어진 부락으로 가서 배우자를 구해야 했는데, 이러한 절차가 너무 어려웠기에 노상에서 여성을 약탈하게 된 것이다.(전영란, 2017: 236; 특히 튀르크몽골계 부락에서는 혈연내혼의 금지 원칙이 더욱 엄격하여, 신랑과 신부는 부계로 위 7대간 통혼한 경우가 없어야 했다.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Werner,2009: 319 참조) 또 다른 요인은 신부대新婦代; bridewealth의 존재이다. 신랑측 가정은 신부의 친척들에게 소를, 그리고 신부의 부모에게는 유르트yurt, 가재도구, 옷, 장신구 등을 지참금조로 지불해야 했다.(Werner, 2009: 319) 이외에도 일반적으로 유목민의 경우 하나의 천막 안에 일정수 이상의 가족이 살기 힘들다는 거주상의 제약, 또 한 장소에서 일정수 이상의 가축을 방목하기 힘들 경제적 제약 등으로 인해 장성하여 혼인을 하는 아들들을 즉각 분가시켜 줄 수 밖에 없는 초원유목의 특수한 환경도 있었다.(김호동, 2004: 50) 따라서 가난한 가구의 남자는 비교적 용이한 약탈의 방식으로 신부를 얻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 약탈은 일종의 영웅적 행동이었기에 장려되는 측면도 존재했다.(전영란, 2017: 236)


여자 한명과 남자 네명이 유르트 앞에서 말을 타고 있다. 여성은 채찍을 들고 뒤쪽의 남자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약탈혼의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1871년 경, 카자흐스탄.


그러나 중앙유라시아 세계에서 약탈혼이 언제나 횡행하였던 것은 아니였다. 대체로 사회가 안정되면 약탈혼, 특히 신부의 동의 없는 약탈혼은 배척받았다. 예컨대 소비에트 이전의 크르그즈Kyrgyz 사회에 대한 사료들에서는 신부의 동의 없는 약탈혼은 빈번하지 않았으며, 발생하는 경우 관습법에 의해 처벌받았음이 확인된다. 현재 카자흐스탄이나 크르그즈스탄에서 횡행하는 약탈혼의 풍습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다시 재개된 현상이다. 이는 소련 몰락 이후 혼란스러워진 사회·경제 상황에 따라 신부대금의 지불을 피하려는 남성쪽 가문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Werner, 2009: 320.) 마찬가지로 원대元代 몽골에서는 법률로 약탈혼이 금지되었고, 몽골 제국 해체 이후 혼란기 다시 보편화되었다가, 청대淸代 몽골 고원의 상황이 안정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전영란, 2017: 236) 여진-만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청대에 약탈혼은 차츰 사라져갔다.(전영란, 2013: 90)



이슬람 세계의 약탈혼


이슬람 법학에서 납치 및 납치혼은 강간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초창기 이슬람 사회에서 납치의 목적을 단순히 강간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강간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코란Qurʾān에 등장하지 않으나, 하디스ḥadīth(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과 관련하여 그의 교우들에 의해 자세하게 기술된 전승)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사피야 빈트 우바이드Ṣafiyya bt. ʿUbayd는 이렇게 전했다. “국가 소유의 노예가 전쟁포로로 잡힌 소녀와 관계를 맺었다. 그는 그녀를 강간했다. 따라서 우마르는 하드ḥadd(복수형은 ḥudūd. ‘제한’ 또는 ‘예방’이란 의미. 이는 코란이나 선지자 무함마드의 순나에 의하여 이미 처벌 내용이 정해진 것으로, 법관의 재량이 허용되지 않는다. 김종도, 2018: 154-155)에 따라 그를 벌하고 그를 추방하였다. 그러나 우마르는 소녀를 벌하지 않았다. 그녀는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슬람 역사상 강간에 대한 가장 초창기 기록이며, 강간범과 그 피해자를 엄격히 구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법이 발전함에 따라 강간은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였고, 그에 대한 금전적 배상diya도 규정되었다.(Semerdjian, 2009)


그러나 납치혼의 목적을 단순히 강간에만 둘수는 없다. 코란은 결혼시 신부대의 지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마흐르ṃahr(본래 어원은 ‘구매비용’이나 실질적으로는 ‘신부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신부의 재산으로 간주되며,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이하는 경우 아내쪽에 주어지는 것이었다. 신부대의 지불은 결혼 합의의 주요한 요소로, 대체로 제3자(즉, 중매자)가 신부측 가정과 협의를 통해 결정했다. 신부대의 액수는 신랑측 가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부측 가정에서 너무 많은 액수의 신부대를 요구하는 경우, 신부쪽에서 신랑에게 가짜약탈혼을 요구하기도 했다.(Nauck and Klaus, 2004: 368)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의 경우, 결혼이나 축첩을 위한 여성의 납치는 빈번했던 것으로 보이며, 초창기의 법정 문서 상에서도 이를 성범죄로 다루고 있지 않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초반 시나이 반도의 베두인 사회에 대한 기록에서도 약탈혼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는 전근대기 납치혼이 유목사회나 교외에서 빈번했던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Ergene, 2011) 부르크하르트Burckhardt는 19세기 초반 베두인 사회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납치혼의 사례를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어느 젊은 여성이 미래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저녁 무렵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다 일단의 청년들이 그 여성을 습격하면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기와 돌로 저항했다. 자신을 납치하려는 이들에 대한 그녀의 저항이 거셀수록, 또래 집단이 그녀를 신망하는 마음도 커졌다. 이 사례는 가짜 납치혼에 해당하는 것이리라.(Monger, 2004: 2)











역사 약탈혼 Ⅰ : 세계적 패턴 2018/08/05 00:23 by tanrim





약탈혼은 창혼槍婚 또는 납치혼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남자측이 폭력적 수단으로 여자를 겁탈하여 강제로 결혼하는 것이다.(전영란, 2018: 235) 납치혼은 19세기에 맥레넌J. F. McLennan을 비롯한 일단의 인류학자들이 제기한 학설으로,(Monger, 2004: 1) 그에 따르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레일리아, 아메리카 대륙 등 인류가 거주한 지역 전체에서 발견되는 결혼 풍습이다. 맥레넌은 결혼의 발생과 역사를 연구한 그의 저서 《혼인의 기원》에서 혼인의례의 최초 형태를 ‘약탈혼’으로 파악하였다. 약탈혼은 ‘족외혼’의 경우에 행해졌는데, 이는 고대의 여아 살해 관습으로 인한 성비의 불균형 및 부족 사이에 교류가 없었던 시기에 불가피한 방법이었다.(이혜정, 2007: 235)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각 부족 간의 관계가 정립되면서 약탈혼 풍습은 자연스럽게 약해졌다가 근대적 법규의 출연으로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Werner, 2009: 316)



니콜라 푸생,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637년, 캔버스에 유채, MET 소장



에이어스Barbara Ayres는 신부 납치와 관련된 결혼 관습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 번째 유형은 ‘약탈혼wife raiding’이다. 이 유형은 남성이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community에서 여성을 훔치는 일이다. 그 다음 유형은 ‘진짜 납치혼genuine bride theft’으로, 이는 신랑이, 대개 자신의 집단에 속한, 특정 여성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 대가로 신랑의 가족은 신부의 가족에 사과나 보상을 한다. 또한 신랑의 가족은 납치 이후 대개 신부의 가족과 인척 관계를 맺는다. 세 번째 유형은 ‘가짜 납치혼mock bride theft’으로, 신부는 납치자들에 저항할 준비를 하여, 무력한 피해자이자 순종적인 딸을 연기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선택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마지막 유형인 ‘의례적 납치혼ceremonial capture’에서 납치는 단순히 의례일 뿐으로, 이미 신부나 그 가족들은 이미 이 납치를 완전히 알고 있으며, 만족한 상태이다. 대체로 약탈혼의 여러 유형은 공존하는 경향을 띈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의 경우, 약탈혼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나 진짜 납치혼, 가짜 납치혼, 의례적 납치혼은 현재까지도 존재한다.(Werner, 2009: 315)


힌두교의 『마누 법전Laws of Manu』에는 여덟 가지 형태의 결혼 형태가 인정되는데, 그 가운데 네 가지는 ‘축복받을’ 결합으로, 나머지 네 가지는 ‘비난받을’ 결합으로 규정되었다. 그 가운데 한가지가 라크샤사rākṣasa로, 처녀를 유괴하여 강제로 결혼하는 것이다. 영국 역사에서도 유괴의 몇몇 예시가 기록되어 있다. 유괴, 특히 여자 상속인에 대한 유괴가 빈번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몇차례의 법령이 입안되었다. 헨리 7세의 재위기인 1487년 발표된 법령은 유괴를 흉악 범죄로 규정하였고, 엘리자베스 시대인 1596년에 통과된 법령에서도 이를 유죄로 다스릴 것을 천명하였다. 그럼에도 고위층에서 유괴가 여전히 행해졌던 것 같다. 1649년 토마스 퍼커링게 경Sir Thomas Puckeringe의 딸 제인Jane이 런던의 그리니치 공원에서 조세프 월시Joseph Walsh가 이끄는 집단에 의해 납치된 것이다. 제인은 조세프 일당에 8년 동안 끌려 다니며 네덜란드, 스페인 등지를 떠돌다 겨우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 다른 예시는 19세기 초반의 일로, 16세의 부유한 여자 상속인 엘렌 터너Ellen Turner 납치 미수 사건이 있다. 에드워드 기번 웨이크필드Edward Gibbon Wakefield와 그의 형제 윌리엄William은 음모를 꾸며 엘렌을 납치했다. 이후 에드워드는 엘렌과 결혼하고 영불 해협을 건너 칼레로 향했으나, 칼레에서 프랑스 당국에 체포된 뒤 영국으로 송환당했다. 영국 정부는 에드워드와 엘렌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웨이크필드 형제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Monger,2004: 1)


근대 납치혼의 경우 주로 소비에트 이후 중앙아시아의 공화국들, 특히 카자흐스탄과 크르그즈스탄을 대상으로 연구되고 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납치로 인한 강제적 결혼은 20세기 말부터 빈도수가 많아졌다. 현재에도 추정치를 최대로 잡으면 키르기즈 여성의 3분의 1이 납치혼의 피해자로 보인다. 근대 들어 납치자들은 종족 또는 종교적으로 다른 집단에서 피해자를 찾았다. 예를 들어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수만명의 힌두교도 또는 시크교도 여성들이 무슬림 남성에 의해 납치당했고, 마찬가지로 비슷한 수의 무슬림 여성들이 힌두교도 또는 시크교도 남성에 의해 납치당했다. 이들 여성의 대다수는 강제로 납치자들의 종교로 개종당했다. 1995년부터 2001년 사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민병대 역시 수백명의 비非파슈툰 여성들을 납치해 탈레반 지휘관들과 강제로 결혼시켰다.(Ergene, 2011; 이외에도 현대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납치혼 사태가 존재했다. 이에 대해서는 Monger, 2004: 1을 참고)






도서 배리 아이켄그린, 《글로벌라이징 캐피털》 2018/07/23 18:00 by tanrim



배리 아이켄그린. 2012. 《글로벌라이징 캐피털: 국제 통화 체제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강명세 옮김. 미지북스.

(Barry Eichengreen. 2008. Globalizing Capital. Princeton University Press)



최근 150여 년 간 국제 통화 체제에 대한 역사책. 경제학에 관심은 많았지만, 도통 공부하는 재미가 없어서 고생이었다. 그나마 역사 관련 책에는 재미를 느껴왔으니, 경제사에서 시작해 하나 둘씩 읽어나가고 있다. 그나마 이 책은 너무 세세하게 파고 들기보다는 주제를 강조했기에 부족한 배경지식에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책의 내용이 쉽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지은이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명백해보인다. 우선 지금의 자본 이동성 추세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또 정치적 민주주의 아래에서, 과거와 같이 통화정책 그 자체를 목적으로 남겨둘 수도 없다. 따라서 환율 관리를 위해 남은 선택지는 변동 환율제와 통화 동맹을 통해 환율 변동성을 없애는 것 가운데, 현 시점에서 아시아와 남미에게는 변동환율제가 최상은 아니나 최선이라는 것이다. 또 이와 같은 국제 통화 체제가 오랜기간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국제 공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가 역사 관련 도서를 선택할 때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 있다면, 결론을 정해놓고 그에 맞는 다양한 사례를 드는 책을 피하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 책 역시 그러한 부분에서 좀 걸리는데, 지은이부터가 서문을 통해 “나는 국제 통화 기제를 너무 세부적으로 서술하기보다 주제를 강조하는 짧은 책을 쓰려고 했다”고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책의 내용이 점차 최근 시점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전망에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는 단서를 달았던 것이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과연 한 학술 분야의 대가다운 처세랄까.

물론 그 덕분에, 책의 출간 이후 일어난 ‘돌이킬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의 영향에 대한 생각은 더 복잡하고 우울한 쪽으로 흘러만 갔다. 술자리에서조차도 모르겠다, 더 나빠지지 않겠냐를 연발하고 있으니. 아니, 애초에 학술서적에서 이와 같은 인사이트 이외의 긍정적인 예언을 기대하는 것을 욕하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스스로를 반성하는게 맞겠다.


책의 번역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만족했다. 사실 책의 원서를 읽다가 기함하고 번역서를 구한 것이라... 책의 편집이나 디자인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특히 참고문헌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책들은 한국어판 서지사항도 추가해주었는데, 보고 정말 감탄하고 감사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두가지 측면에서였다. 첫번째는 제목. 왜 굳이 제목을 원서명의 음역으로 처리했을까. 본문에서는 비슷한 표현에 대해 ‘자본의 세계화’라 옮겼는데 말이다. 두번째로 아쉬웠던 점은 지은이의 주석을 책의 말미로 돌린 것이다. 지은이의 주석이 단순히 출처만을 나타내면 모르겠는데, 상당 부분은 본문에 대한 추가 설명이었다. 주석이 많이 달린 장에서는 81개나 있는데, 그걸 전부 왔다 갔다 하며 읽는 일은 고역이었다.




어지간하면 정착된 번역어를 바꾸는 것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the bank of England를 ‘영란은행’으로 옮기는 것 만큼은 꼭 좀 바꿨으면 좋겠다. 난 처음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왕의 공유하던 시대의 유산인줄 알았다.

문화 180720 피크닉 사카모토 류이치전 / 익선동 아트몬스터 2018/07/21 18:10 by tanrim



Piknic (피크닉)에서 진행중인 사카모토 류이치전, Life, life에 다녀왔다.
사카모토 류이치에 대해서는 그냥 ost 많이 작곡한 사람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1.5만원이나 내고 사카모토 류이치 전시회에 다녀왔다고 하니
친구의 “1.5장이나 주고 영감 피아노 치는걸 보러 갔다고?”라는 말에 반박도 못했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자,
사카모토 류이치는 전위적인 예술가였더라.
원래 현대 예술을 잘 이해못하는데,
음악의 힘이었을까,
그 의미는 잘 몰라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안경테 이쁜거 쓰는 영감님...
머리 스타일도 요즘은 포마드 쭉쭉 바르는 것보다 이런게 당기네...




영상이나 그 소리도 아름다웠지만,
자세히 보니 전부 아이패드, 아이폰으로 틀어주는 거라 더 인상 깊었다.




사진이 좋아서 그냥.

사실 Piknic의 그 유명한 루프탑 포토존에 사진찍으러 간거였는데,
나름 귀호강 눈호강하고 왔다.
루프탑에 나간건 해지고 나서라 폰카에 루프탑 사진을 제대로 못 남긴건 아쉬웠지만...
다음 방문은 무조건 낮에 가야겠다.

이후 광화문 쪽으로 가서 그 유명한 광하문 국밥을 방문하려 했으나,
이미 마지막 주문 시간이 끝나서 눈물을 머금고 익선동으로 갔다.


예전에 친구랑 갔을때는 맥주가 모잘라서 못먹었던 샘플러 주문.
그때도 3번(청담동 며느리인가?)이 다 떨어져서 못마셨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제일 좋았음.
같이 간 사촌 동생의 평도 그랬고.




안주로는 저녁을 겸해 반반 치킨.
맛나더라.
뼈 골라 먹는게 약간 상그럽긴 했지만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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